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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3-14 11:25
십자가의 길 - 지거 쾨더
 글쓴이 : 홈지기수녀
조회 :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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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처 사형 선고 받으심 / 넘겨주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예수께서는 신성모독자이자
정치적 반란자로 붙잡혀 묶이고 넘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분은 종교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이라는
맷돌 사이에서 가루가 될 밀알이셨다.
그분은 흔들리지 않고 자기의 사명에 충실했다.
즉 '눈먼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주고,
'앉은뱅이들'을 다시 자기 발로 일어서도록 도와주고,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소외상태에서 해방시켰는데,
이는 모든 면에서 우리 인간을 염려하는
사랑의 하느님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림에서 예수께서는 가야파와 빌라도 앞에 서 있다.
그들은 예수 때문에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는 권력구조의 대표자들이다.
가야파는 토라 두루말이를 꽉 붙잡고 있는데,

그것이 그에게 성스러운 하느님의 율법이기 때문이다.
그는 불만에 찬 찡그린 표정으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예수께서 사람이 율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셨기 때문이다.
오른쪽에 빌라도가 있다.
이는 심각한 종교적 갈등에 빠져들어간 세속적 권력을 대변한다.
빌라도는 이 갈등을 제대로 파악도 하지 못한다.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붉은색 옷을 걸치고,

빌라도는 '무죄'의 물에 자신의 손을 씻는다.
대야의 물이 핏빛으로 빨갛게 물들어있다.
이것은 그가 이 살해모의의 공범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살해공모에는 종교 지도자와 세속적 권력자의 손은 함께 협력한다.
이런 의미에서 두 사람의 시선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재판관들 앞에 상체를 드러낸 채 고개 숙이고 있다.
그리고 그가 걸친 옷의 붉은 색은 왕이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고난받는 야훼의 종으로서
'나는 거역하지도 아니하고 꽁무니를 빼지도 아니한다.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긴다'(이사 50,5-6)는 말씀처럼 내 맡겨진 자세이다.



제2처 십자가 지심 / 끌어안음

'그 분은 몸소 십자가를 지셨다'
판결이 내려졌고 처형은 행해진다.
채찍질 때문에 피를 흘리는 그의 손이 십자가를 잡고 있다.
그 손은 들보를 껴안는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예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

지거 쾨더는 십자가의 길에서
시간을 넘어서서 다른 강조점을 부여한다.
가로 들보 위에 무거운 철 갈고리가 걸려있다.
그리고 가로 들보와 평행하게
처형장으로 이어지는 레일이 있다.
이는 베를린의 플뢰첸제(Pl tzensee)에 있는
감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광경이다.
그곳에서 1944년 7월 나치의 앞잡이들은

불의와 증오의 독재에 대항해서 투쟁했던 남자들을 처형했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고, 그들의 말살이 곧 이어졌다.
플뢰첸제의 철길은 고문당하고 처형당했던 무수한 사람들의 상징이다.
그들은 정의, 인간존엄, 억압당한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 투신했던 것이다.
권력과 무기력, 편협함과 자유, 억압과 절규 사이의 투쟁이

피의 띠처럼 역사를 관통한다.
그리고 그런 일이 벌어지는 곳 어디서나
나자렛의 예수를,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서 처형된 분을 기억할 수 있다.



제3처 첫 번째 넘어지심 / 모퉁이의 머릿돌



제4처 성모님을 만나심 / 아무 말이 없으심



제5처 시몬이 함께 십자가를 짐 / 유일한 아들

'그들은 그로 하여금 억지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
얼굴 둘, 몸 둘, 손 넷, 무거운 들보 하나가 있다.
그들은 이 들보를, 짓누르는 십자가 들보를 어깨에 짊어졌다.
마치 그들이 짐을 짊어지는 일에 익숙해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어떻게 자세를 고수하는지 눈길로 더듬고 싶어진다.
팔 하나는 공동의 짐을 감싸고, 다른 팔 하나는 상대방을 감싸고 있다.
복음서는 키레네 출신의 남자를 시몬이라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가 막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농부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처형장으로 가고 있는 행렬과 만난다.
왜 그가 병사들에게 호출 당했을까?
시몬은 들보를 꽉 움켜잡고 나르기 시작한다.

지거 쾨더는 이 그림에서 복음서의 진술로부터 벗어나자 기 자신의 길을 간다.
시몬은 예수 앞에서 십자가를 운반하지 않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를 짊어진다.
이로써 시몬은 우리에게 다른 시각을 일깨워준다.
두 얼굴은 얼마나 닮았는가!
얼굴 생김새, 눈, 코, 입, 수염 등 이 두 사람이 혼동될 정도로 비슷하다.
다만 푸른 옷을 입은 사내는 얼굴에 자기 일의 색채를 띠고 있다.
붉은 옷의 사내는 창백한 얼굴에 모욕당한 흔적을 지니고 있다.
뒷면에 있는 그들의 팔은 서로 교차되어 상대방의 몸을 감싸고 있다.
그들은 함께 하는 일로 서로 얽혀있는 살아있는 십자가이다.
두 사람의 눈은 우리를 향하고 있다.

시몬은 눈으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십자가를 억지로 짊어지게 되었지만 거역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짊어지겠습니다.
나는 여기 있는 내 형제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 그와 연대하겠습니다.
우리 둘이 짊어질 겁니다. 서로 부축하며 짊어질 겁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들의 고통에 너무 깊이 관여했다.
사랑과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그들은 나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나는 이 고난의 길을 끝까지 가겠다.
그리고 시몬, 그대는 나의 길을 함께 갈 것이다.'

우리는  연대성을 이보다 더 분명히 말해주는 그림을 볼 수 없다.
예수께서는 고통 당하는 인간, 즉 '십자가를 진 사람'과 연대한다.
우리가 시몬처럼 짊어지게 된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그 무게가 우리를 압박한다면
그때는 미리 그런 징후를 지녔고, 그 징후에 자신을 내어준 분이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를 받쳐주고 나와 함께 십자가를 짊어질 것이다.
그는 인간들의 형제이다.
그를 통해 우리의 고통을 나누면 고난의 길을 넘어 희망의 오솔길에 이를 것이다.



제6처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드림 / 진정한 이콘

베로니카는 성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루카가 전하는 유일한 언급은 예수께서 탄식하는 여인들 곁에 잠시 머무는 장면뿐이다.
그러나 베로니카라는 이름은 14처 때문에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다.
4세기경부터 깊은 신앙심 때문에 예수의 고난의 길을 따라하기 시작했을 때,
그 당시 생겨난 전설에 따르면 그 이름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나타난다.
그녀의 이름은 베로니카(Vera Ikona, 이 이름은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합성어이다)로,
진짜 형상을 의미한다.
전설은 이 여인을 고수한다.
그녀의 수건에 고난받는 자의 얼굴이 찍혔고, 이 수건으로써 치유효과가 생겨났는데,
황제 티베리우스가 이 수건 덕분에 병이 나았다고 한다.
붉은 옷의 여인은 루가가 말하는 예루살렘의 딸들 중 하나였을 수 있다.
그들은 형장으로 이어지는 길거리에 서 있다.
유죄판결을 받은 자가 걸어가는 길을 내기 위해

병사들이 자리를 마련해야 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왜 그때 한 여인이 충동적으로 수건을 꺼내 땀과 피로 얼룩진 그의 얼굴 앞에 내밀었을까?
그의 얼굴은 막 이루어진 접촉에서 생긴 네거티브 사진처럼 뒤에 남아있다.
이 그림은 어떤 사명을 전하고 있다.
베일 뒤에 있는 여인의 눈은 계속 끌려가는 예수를 더 이상 바라보지 않는다.

그녀는 어떤 흑인을 바라보는데, 그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빈 대접을 들고 음식을 구걸한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본양식이 필요하다.
온정에 대한 간청이 구체적으로 필요한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계속된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에서 그 방향을 찾을 수 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40).



제7처 두 번째 넘어지심 / 당신과 더불어



제8처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 / 돌보기



제9처 세 번째 넘어지심 / 아멘!



제10처 옷 벗김을 당하심 / 누구의 것?

'그들은 내 겉옷을 나누어 가졌다'
요한복음이 이야기하듯이 '위에서 아래까지 이은 곳 없이 통으로 짠' 예수의 하얀 옷가지가

색상이 화려하고 분명하게 구분되는 이 그림의 중심에 있다.
'한 조각'으로 된 예수의 이 속옷을 놓고 병사들이 제비를 뽑았다.

이 속옷은 이미 고대 교회에서 나눌 수 없는 교회의 일치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독일 남서부의 트리어(Trier) 도시에 있는 성의(聖衣) 순례 때,
그곳에서 보게 되는 성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인간 예수에 대한 감동적인 추억이 되었다.
이런 해석을 배경으로 하여 지거 쾨더의 그림이 구성되어 있다.
이 그림은 우리의 시선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우리로 하여금 돌이켜 생각하도록 자극을 줄 것인가?
이 그림에서는 예수의 옷가지 주위에

그리스도교 교회의 주된 세 흐름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다.
앞쪽에 금빛 나는 제복을 걸친 그리스 정교회 사제가 있고,
그의 옆쪽으로 검은색 가운을 걸친 프로테스탄트 목사가 있으며,
그의 맞은편에는 진홍색의 주교관과 옷을 걸친 로마가톨릭 주교가 있다.
이 세 사람 모두 함께 숭배하면서 예수의 옷 한 조각을, '그들'의 조각을 잡고 있다.
이것은 예수의 유산에서 '그들'이 지니는 몫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핏빛처럼 붉은 깃발을 든 검은 피부의 사람이 이 경건한 전원적인 풍경을 망치고 있다.
묘사된 '성의'(聖衣)에 흐트러지고 쪼개지는 십자가 형태로 찢어진 틈이 보인다.
분리된 채 있는 종파 사이에서는 복음 역시
'그리스도의 몸'을 쪼갠 것에 대한 분노를 없앨 수 없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유산에서 자신의 몫에 자족적으로 만족해하면서
그 유언의 본뜻을 망각하고 뒤로 제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유언이 여기에서는 십자가의 그림자 속에 제시된다.
지나치기 쉬운 십자가의 그림자가 붉은 색 깃발을 든 흑인에게로 이어진다.
이것은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도전적인 질문이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인간들의 어려움과 다시 섞이지 않는다면,
예수의 십자가는 오히려 그 해방시키는 구원의 힘을 죽이게 될 것이다.



제11처 십자가에 못박히심 / 마주보고

'그곳에서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이 그림은 얼마나 낯선 광경인가!
골고타에서 눕혀져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없다.
이 그림은 우리의 감상 습관을 방해한다.
이 그림은 우리의 시선이 가는 방향을 바꾸고 마치 우리를 십자가의 길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 그림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눈으로 보게 한다.
팔다리를 뻗고 십자가에 누워 예수님의 눈으로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게 한다.
그 하늘에서 죽은 검은 태양이 그를 내려다본다.
화환 형태의 얼굴들이 누워있는 자, 다시 말해서 나를 내려다본다.
마치 내가 해부될 준비를 하고 수술대에 누워 있는 것 같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갑옷으로 무장한 로마 병사가 망치를 격렬하게 내리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은 아니다.
즐기면서도 깔보는 히죽거림 외에, 깊이 생각하는 표정도 찾아볼 수 있다.
당황하는 표정도 있고 고통스러워하는 표정도 있으며, 슬퍼하는 표정도 있다.
어떤 사람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또 어떤 사람은 성서 두루말이를 바라본다.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또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예언들이 그에게 암시되는 것 같다.
'그들은 자신들이 찌른 사람을 바라볼 것이다.'
자신을 고난받는 예수와 일치시키고
'못 박힌 존재', 즉 묶이고 못 박혀 고정된 존재에 대한 고유한 경험을
이 그림 속에 옮겨놓도록 화가가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에게서 행동의 자유를 몽땅 빼앗지는 않아도 우리를 못박아 고정시키는 것으로
질병과 장애, 직업상 그리고 가족관계상 피할 수 없는 부담, 다른 사람들의 선입견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곤경과 고난과 비참함 속에 못 박혀 고정되어 무기력하며,
내맡겨진 채 놀라서 쳐다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인간들이, 민족 전체가 폭력의 희생물이 되는 곳에서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고,
세계의 언론들이 방관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런 곤경을 알고 있다.
그는 이런 곤경을 몸소 체험한 것이다.
우리 중에서 '형언할 수 없는 텅 빈 눈구멍'(그림의 형상)을 바라본 사람은
자신이 예수님의 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제12처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 / 대학살(Holocaust)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십자가 아래에 있던 백인 대장의 외침,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는 복음의 혁명적인 내용,
즉 십자가형에 처해진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복음'을 요약하고 있다.
예루살렘과 로마의 종교적·정치적 권력자들에 의해 처형되었지만
생명의 하느님에 의해 부활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다.
로마 황제에게 고용된 사람의 이 외침으로
복음은 로마 황제를 하느님의 아들로 선언하는 정치적 선언과 배치된다.
십자가에 처형된 이 가련한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로,
하느님이 심지어 가장 가난한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의 삶에

얼마나 불멸의 사랑을 품고 있는지를 계시해준다.
그는 이 모든 사람들을 하느님의 아들과 딸로 삼는다.
예수와 율법 사이의 대립은 분명히 너무 극단적이어서,

권력자들은 예수를 제거함으로써 그의 일을 끝내려고 했다.
예수는 물리적인 폭력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메시지와 행동은 종교적·정치적, 유대적, 로마적인 사회의 토대를 흔들어 놓는다.

그림은 성전의 휘장이 찢기는 모습인데,
마치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예수께서 양쪽 담을 허물고 있는 강한 인상을 느끼게 한다.
하느님의 아들과 딸들을 제외시키고 그 자녀들을 죽이는 체제 속에서는
더 이상 하느님을 발견할 수 없다.
예수님의 죽음은 율법을 수호하기 위해 인간을 희생시키는 것과 같은 율법을 부순다.
그게 로마의 율법이든, 시장경제의 율법이든, 아니면 하느님 자신의 율법,

즉 시나이 산의 율법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왜냐하면
'안식일이 인간들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기'(마르 2,27) 때문이다.



제13처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 / 어머니의 자궁

노을이 물든 밤중이다. 장소는 십자가 아래임을 알 수 없다.
마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내려온 것과 같이 어둠도 위로부터 땅으로 내려오고 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려놓는 것과 장례 사이의 고통스러운 순간이 묘사되어 있다.
마리아는 절망과 슬픔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저항한다.
한 손으로 그녀는 아들을 세우고 그의 버팀목이 된다.
마치 그녀가 아들이 아기였을 때 똑바로 세우고 받쳐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그의 숙여진 머리는 더 이상 똑바로 설 수가 없다.
피가 넘쳐흐르는 그의 머리는 무겁게 가슴에 안겨 있다.
그의 눈은 감겨져 있다.
그는 마리아를 더 이상 바라볼 수 없다.
안겨있는 예수님의 자세는 마치 어머니의 자궁에 있었던 아기의 자세이다.
그리고 예수의 등에는 노아의 홍수 때, 방주로 돌아 온 비둘기처럼 부리에 올리브 잎을 물고 있다.
이것은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일깨운다.
그의 죽음이 세상을 구원하였다는 증거의 표지이다.
마리아의 초록색 외투는 말씀에 희망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교회의 표상이다.
즉 절망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교회 구성원들의 믿음을 말해주고 있다.
두 개의 해골에서 어두운 눈구멍이 그림 감상자를 쳐다본다.
해골의 눈들은 호기심에 차서 뻔뻔하게 바위틈을 통해 바라본다.
피투성이가 된 이 사람의 죽음으로 죽음이 궁극적으로 극복되었음을 알고 있기라도 한것 같다.
'죽음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모두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1고린 15,21이하).
이런 연관성이 두 개의 해골(아담과 하와)로 암시되었다.
교부들의 전승에 따르면, 골고타는 아담의 무덤 이라고 한다.
열린 무덤 사이로 해골이 드러난 것은 부활의 표징이다.



제14처 무덤에 묻히심 / 누에고치

'그러고 나서 그는 돌을 굴려 무덤 입구를 막아 놓았다'
때는 안식일 전이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율법은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런 사건의 진행이 어땠는가에 대해 전승은 아마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을 중시했을 것이다.
처형 후 이제 누가 매장을 떠맡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분명히 해야 했다.
심하게 놀라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 외에, 행동할 수 있었던 남자 한 명과,
아마도 안식일이 지난 후

죽은 자를 어떻게 돌볼 수 있을지를 생각해둔 여인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랍비 예수에 대한 성실함, 고통 속에서의 객관적 사고,
그의 죽은 몸에 대한 경외심 등을 이 텍스트에서 느낄 수 있다.
그 다음의 일이 모든 인간적인 경험을 부수었기 때문에,
죽은 자가 다시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을 특히 정밀하게 재현했을 것이다.
마치 무덤 내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은 매장 장면의 그림을 이것 말고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어두운 공간, 즉 바위 무덤 안으로 인도되어진다.
수건으로 싸매어진 예수가 있다.
그의 상처에서 나온 피가 붕대에 배어있다.
이 사람이 정말로 몇 시간 전에 죽은 그 처형당한 사람이라는 표시이다.
그렇지만 캄캄해야 할 무덤 안에서 이 사람의 몸은 빛을 내고 있다.
죽은 자의 머리 위쪽에서는 부활의 신비의 빛이 강렬하게 반짝이고,

조심스러운 표징 속에서 부활의 신비를 볼 수 있다.
신경에서 우리에게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라는 짧은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남녀 제자들의 증언은 부활절 이후의 만남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의 매장과 안식일 다음날 아침 사이에는 신비가 놓여있다.
약한 빛이 앞쪽으로 굴려진 돌 사이를 통해 무덤 안으로 스며든다.
첫 번째 연한 밝음은 떠오르는 태양의 전령이다.
이것은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을 알려주는 것 이상이다.
죽음은 더 이상 삶의 끝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시작이다.
믿는 사람 누구에게나 새 날의 시작인 것이다.
부활절 아침의 예고는 모든 무덤을 넘어서는 것을 가리키고,

또한 우리를 잠들게 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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